어린이집 교사로 처음 발령받았던 날, 가장 먼저 받은 것은 월별 주제 계획표였습니다. 3월은 ‘새 친구’, 4월은 ‘봄’, 5월은 ‘가족’… 교재에 따라 짜인 플랜을 보며 안심했던 것도 잠시, 실제로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보니 깨달았어요.
놀이란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계획과 아이 사이에서 탄생하는 ‘여백’으로 살아나는 거구나.
이 글은 단순히 계획표를 짜기 위한 안내가 아닙니다. 아이 중심, 관계 중심의 놀이 플랜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해왔는지, 그리고 지역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협력하고 변주해왔는지에 대한 살아 있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매달 달라지는 계절, 발달 단계, 감정의 흐름에 맞춰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월별 주제와 놀이 사례를 연령별로 제안드릴게요.
교육 목표와 주제 흐름: 왜 ‘월별 플랜’이 여전히 필요한가
“요즘 아이들은 그때그때 관심 가는 걸로만 놀게 해야 하지 않나요?” 물론 맞는 말이에요. 주제 중심보다는 유아의 자율성과 반응 중심 놀이가 더 중요하다는 관점이 커지고 있죠.
하지만 교사로서, 특히 집단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함께 이끌어야 할 때는 월별 주제가 하나의 ‘놀이 맥락’으로서 기능해요. 매달 주제를 설정하면 교사끼리 협업도 쉬워지고, 놀이의 흐름에 일정한 리듬감과 안정감이 생기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5월 ‘가족’ 주제를 중심으로 놀이를 구성하면, 역할놀이, 그림책 활동, 사진 만들기, 감정 표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의 키워드를 반복 노출하게 되죠. 그 반복 안에서 아이는 익숙함을 갖고, 익숙함은 놀이의 몰입도로 이어져요.
저희 어린이집에서는 매달 ‘감정 주제’를 병행해요. 3월엔 “처음”, 4월엔 “기다림”, 5월엔 “고마움”, 6월엔 “자라남” 같은 감정 흐름을 테마화해요.
단지 ‘봄’이 아니라, 봄을 대하는 아이의 감정을 이야기로 만들고, 놀이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
월별 주제는 구조가 아니라 서사입니다. 아이와 교사가 함께 따라가는 이야기의 흐름이죠.
연령별 구성 팁: 연령 차이를 기회로 만드는 방법
같은 ‘주제’ 안에서도 연령별 놀이 구성은 전혀 달라야 해요. 저는 3세반, 4세반을 모두 맡아본 경험이 있는데, 같은 ‘비’ 주제도 3세에겐 감각 중심, 4세에겐 상상력 중심으로 접근해야 반응이 달라지더라고요.
예시: 6월 ‘비’ 주제
- 만 2~3세:
- 물감 찍기 (비 떨어지는 느낌 표현)
- 종이 우산 접기
- 물 뿌리기 소리 놀이
- 감정 단어: “촉촉해”, “시원해”, “무서워”
- 만 4~5세:
- 비 오는 날의 이야기 만들기
- “비가 와서 놀이터에 못 갔어” 상황극
- 우산이 필요한 동물은 누구일까? 상상 토론
- 빗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해 보기
같은 주제를 두고 연령에 따라 놀이 방법이 바뀌면, 아이 각각의 발달 속도에 맞춘 깊이 있는 경험이 가능해져요.
그리고 지역 공동육아센터에서는 연령이 섞인 다양한 아이들이 함께하는 활동이 많아요. 그럴 땐 역할을 유연하게 배분하면 좋아요. 예를 들어 ‘가족 놀이’ 주제에서 큰아이는 부모 역할, 작은아이는 아기 역할, 더 어린 아이는 인형 돌보기처럼 자연스러운 계층적 놀이가 형성되죠.
연령 차이는 장벽이 아니라, 놀이의 층위를 만들어주는 자산이에요.
실제 월별 놀이 플랜: 유연한 틀, 여백 있는 구성
실제 제가 운영했던 2024 상반기 월별 놀이 구성 예시를 공유드릴게요. 중요한 건 놀이의 흐름이 아이에게 감정적 스토리로 연결되도록 설계하는 것입니다.
3월 | ‘처음’ / 친구 | 이름 부르기 게임, 친구 얼굴 꾸미기, 손 인사 놀이 | 2세는 얼굴 스티커 붙이기, 4세는 친구 소개 책 만들기 |
4월 | ‘봄’ / 자라남 | 씨앗 심기, 나뭇잎 프린팅, 계절 동화 그림그리기 | 3세는 감각 위주, 5세는 식물 일기 작성 |
5월 | ‘가족’ / 사랑 | 가족 사진 꾸미기, 가족 역할놀이, 고마운 마음 편지 | 2세는 가족 얼굴 도장, 4세는 편지 읽어주기 |
6월 | ‘비’ / 기다림 | 물놀이 놀이감 만들기, 비오는 날 우산 그리기, 빗소리 소리놀이 | 연령별로 빗소리 표현 방식 다르게 구성 |
7월 | ‘여름’ / 시원함 | 얼음놀이, 부채 만들기, 여름 색 탐색 | 3세는 물감 섞기, 5세는 색깔 분류와 감정 표현 연결 |
이 표는 단지 실행 계획이 아니라, 놀이 안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감정을 표현하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를 고려한 설계예요.
교사의 역할은 계획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계획과 아이 사이의 여백을 읽고 채워주는 일이죠.
‘플랜’은 놀이를 시작하기 위한 초대장일 뿐
놀이 계획표는 아이를 통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이를 초대하는 열린 구조, 그리고 교사와 아이가 함께 만들어갈 서사의 시작점이에요.
우리는 계획된 것보다 계획되지 않은 순간에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놀게 되죠. 월별 플랜은 그저 그런 가능성을 열어주는 통로일 뿐입니다.
계획은 엄격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관계는 느슨하지 않아야 하죠. 아이의 감정과 시선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놀이 플랜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