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교사라는 건 매일 아침 20개의 우주를 만나는 일입니다.
결혼하지 않았고 제 자녀도 없지만, 아이들과의 시간은 마치 제가 이 세계의 일부를 매일 새로 조립하는 느낌을 줍니다.
그 속에서 제일 많이 고민하는 건 단 하나예요. **“오늘도 재미있었냐”**는 질문 앞에 아이들이 미소로 답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래서 오늘은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 중에서도, 특히 효과가 있었고 의미도 깊었던 놀이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역할놀이, 블록놀이, 미술놀이라는 단어는 익숙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안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는, 교실 바닥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켜본 저 같은 사람이 제일 잘 알죠.
역할놀이: 아이가 살아보는 ‘작은 세상’
아이들은 현실보다도 역할 속에서 더 자기답게 살아갑니다.
예전에 '슈퍼맨'을 좋아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쿠팡맨’을 흉내 내고,
예전엔 ‘엄마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선생님 놀이’, ‘유튜버 놀이’**를 하더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한 아이가 소꿉놀이 중에 주문받은 음식을 ‘리뷰 영상’으로 설명하던 장면이에요.
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낮췄다 하며 “구독과 좋아요 눌러주세요~”라고 말하는 걸 보는데,
순간 울컥했어요. ‘이 아이들은 이미 우리가 사는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구나’ 싶어서요.
그래서 저는 요즘 역할놀이 시간을 단순히 ‘놀게 두는 시간’으로 두지 않아요.
주제별 직업 복장을 마련하고, 실제로 관찰한 사회적 역할에 대해 아이들과 먼저 이야기를 나눈 뒤 놀이를 시작하죠.
동사무소 역할놀이를 할 땐 진짜 도장, 서류 봉투, 이름표를 제공했고,
그랬더니 아이들은 ‘민원’이 뭔지, ‘기다림’이 왜 중요한지 몸으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역할놀이는 단순히 흉내 내는 놀이가 아닙니다.
공감력, 상황 인지, 그리고 책임감을 담는 놀이터예요.
아이들 눈에 비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엿볼 수 있는, 그 무심한 연극 한 장면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블록놀이: 정답이 없기에 더 훌륭한 놀이
요즘 아이들은 뭐 하나 물어보면 “맞아요?”라고 되묻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땐 속이 좀 아려요. 아이답게 상상하면 되는 일에 ‘정답’이라는 틀을 먼저 씌운 건 아닌지.
그래서 저는 블록놀이를 정해진 설계 없이 시작합니다.
설명서가 없는 블록 상자 하나를 놓고 “이걸로 뭘 만들까?”라고만 물어요.
처음엔 머뭇거리던 아이들이, 점점 이야기와 손놀림을 더해가요.
다리 세 개 달린 버스, 바닥이 없는 집,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기차까지.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네 명의 아이가 하나의 건물을 만들면서
“너는 기둥 해줘”, “나는 문 만들게” 하며 자연스럽게 협동의 구조를 세우던 때예요.
그 장면은 마치 건축이 아니라, 작은 사회를 조립하는 것 같았죠.
그리고 요즘은 지역의 재활용 센터나 장난감 도서관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블록을 구비하고 있어요.
정형화된 ‘레고’에서 벗어나, 나무 블록, 종이 큐브, 자석 타일 같은 재료들이 훨씬 더 풍부한 감각을 제공하거든요.
블록놀이는 단순히 ‘조립’이 아닙니다.
판단력, 공간 인식, 그리고 협업이라는 키워드를 손끝에 쥐게 해주는,
아주 정직하고 유연한 놀이예요.
미술놀이: 결과보다 ‘흐름’을 보는 눈
어른들이 자주 묻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어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미술놀이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색을 고르는 시간, 손에 물감이 묻는 느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색이 종이를 채우는 그 흐름 자체가 목적이죠.
제가 최근에 했던 활동 중 아이들에게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건 **‘열 손가락 드로잉’**이에요.
붓도, 도구도 없이 손가락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데요,
아이들이 정말 자유롭게 손을 놀리더라고요.
그림의 형태는 엉망일 수 있지만, 아이의 감정 곡선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작품들이에요.
또, 지역 미술작가들과 연계한 작은 워크숍을 진행했어요.
작가는 캔버스를 가져왔고, 아이들은 물감과 붓을 제공받았죠.
“예술은 틀릴 수 있어야 해요”라고 말해준 작가의 한마디가 아직도 마음에 남습니다.
미술놀이는 정서 표현의 통로이자, 자기 존중감을 길러주는 창이에요.
때로는 '틀려도 괜찮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어떤 날엔 '내 생각이 멋지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죠.
요즘 잘나가는 놀이란 결국,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해요.
역할놀이에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블록놀이에선 상상력과 협업을,
그리고 미술놀이에선 감정을 표현하고 존중받는 방법을 배웁니다.
제 자녀는 없지만, 매일 아이들을 통해 저 역시 자라고 있어요.
놀이란 결국, 우리가 아이들을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 아닐까요?
정답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이,
결국 진짜 좋은 놀이를 만들게 됩니다.